논습지위원회 - 논습지위원회 게시판입니다. ^^
글수 105
생태페다고지
5장 생태적 용기- 고등학생에게 필요한 것
- 왜 지금 용기를 이야기하는가?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인권, 민주주의, 평등, 호혜성, 이 모든 것은 '유예된 가치'일 뿐이다. 그러나 생태경제학적 측면에서
고등학생 나이면 이미 '정상적인 소비자'에 해당하며, 한 사람의 시민 혹은 지구시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생태적 가치는 다른 가치들처럼 유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지역생태계의 몰락이 유예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듯이
고등학생들의 의무도 유예될 수 있는 셩격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가장 억압받으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삶을 수탈당하는 존재가 바로 고등학생들이다. 정작 용기라는 덕목이 십대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덕목임에도
한국에서 그 덕목은 가장 경계하는 것이 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문하고 싶다.
새로 등장하는 십대가 생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이것이 신자유주의로 점철된 시장 근본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중요한 무기가 된다. 굳이 생태적 활동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용기라는 덕목을 추천하는 이유는? 생태적 활동은 개인들의 작은
실천이나 삶의 변화만으로도 시스템 전체에 변화를 만들어낼 여지가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에게 요구하고 싶은
생태적 용기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식단을 약간 바꾸는 것, 인스턴트 패션 대신에 '지속가능한 패션'에 관심을 갖는 것,
유기농 청바지를 한 벌 정도 구매하는 것들이다. 지금 우리의 생태적 문제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큰 실천이든 작은 실천이든
용기가 필요하다. 친환경 제품들의 구매에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때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작은 흐름들이
모여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생태계가 한두 종의 영웅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수없이 작은 생명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풍성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 생태적 소비와 소비자 주권
경제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 누구나 지도자가 되거나 녹색 전사가 될 필요는 없다. 생태적 소비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사실은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단적인 생태운동을 만들어낸 최초의
계기는 바로 소비운동이었다. 19세기 후반 귀부인들 사이에서 자신이 쓰는 모자에 새의 깃털을 꼽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로
인해 뿔논병아리가 멸종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모자에 깃털을 꼽지 않는 것을 좀더 고귀한 일로 간주하는
새로운 유행이 생겼고, 이 흐름은 1889년 영국 왕실보호협회 창설이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실상 최초의 환경단체이며,
조직적인 생태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국가의 국민경제가 더욱 생태적인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닌가, 이것은 시장
자체의 결정이라기 보다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선호나 기호 혹은 문화와 윤리적 전통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소비자들의 집단적 결정이 가장 우선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들이 국가를 생태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다음 세대를 희생시켜서라도 우선적인 개발을 끌고
나가고자 하는 지금, 소비자들의 선택은 더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은 조직 앞에서 무기력하고, 또
우리가 알고 있던 정보들 역시 때로는 잘못되어 있거나, 의도적이고 교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소비
행위 자체에도 많은 교육과 정보가 필요하며, 결국 일종의 집단적인 '실천적 학습'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 청정 생산과 기업을 보는 눈
청정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더 청정한 상태는 있을 수 없지만, 먹고 소비하고
온도를 유지하거나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은 어쨌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태적 부하'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최소한의 물질들이 완벽하게 재순환되는 방식과 태양광과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구성된다면 청정 생산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당분간은 실현하기 어렵다.
대개 기업을 변하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호나 기호 같은 것들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정부가 실시하는 '제도'다.
기업들은 수십 혹은 수백 가지 제품들을 생산한다. 어느 제품군은 생태적으로 우수하더라도 다른 제품군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기업이 생태적이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어쨌든 대체로 기업은 소비자의 행위
패턴을 한 축으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정부의 제도라는 두개의 신호를 감지하면서 자신의 미래
행위를 결정한다. 생태문제의 주범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국내 단체, 기구, 기업 안에서 이러한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교육과정을 통해 배출된 사람들이라는 점을 환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멀지만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른 길일 수 있다.
- 생태적 노동과 즐거운 삶
존 갤브레이스가 '풍요의 시대'라고 불렀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포디즘 시대까지는 세상이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에서 움직였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할 수 있고,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과 미래를 개척할 수 있었던
시기가 OECD국가들 내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한국에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청년실업을 중심으로 한국의 노동 재생산은 무저졌고, 수출과 수입을 더한 것을 경제의 대외의존도라고 부르는데, 어느새
이 수치는 80%이상이 되었다. '세계의 공장'역할은 낮은 인건비로 버틸 수 있는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에게 자리를 넘겨 준
지 오래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국민경제의 구조적 어려움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경제관료가 믿는 방식대로 고성장 시대로
복귀하면 어떻게 될까? 대기업에 조금 더 많은 정책적 편의를 제공하고, 특히 건설업을 축으로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속
해서 일으켜서 건설 중심의 내수 경제로 가는 길이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부의 고성장 전략이다. 이러한 고성장 전략은
반생태적 국민경제라고 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나 생물종 다양성과 같은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 지표로 드러난 것은, 바로
케인스 시대 포디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다. 이러한 상황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려고 한다면, '대량
소비'의 폐해가 다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량소비 없이 대량생산이 가능한 경제 시스템이 가능할까? 여기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에너지와 물질의 소비를 문화와 지식에 대한 소비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과시적 소비 문화가 극복되어야 하고 또한 일하는 시간 자체에서 삶의 안정을 찾는 식의 노동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부자들의 에너지 소비는 늘고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 경제 내부의 격차를
줄이면서 동시에 생태적 낭비를 줄여 나가는 것이 생태적 노동의 기본 취지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게으름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빈둥빈둥하면서 지내는 시간은 산책을 하거나,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정한 아름
다움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예술적 창작 같은 데에 쓰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소비를 위해서 노동하고, 마케팅하는 방식만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 정작 또 다른 많은 국민들은 일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상대적 빈곤이 늘어나는 지금 '일해야 즐겁다'라는
오래된 경구들에 진지하게 의문을 던져야 한다. 반생태적 경제에서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신나게 소비하는 것이
즐거운 삶이었다면, 생태적 경제에서는 소비가 아닌 것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생태적 의미에서 경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인지도 모른다.
- 농업 : 심층 생태주의 대 표피 생태주의
시장주의 경제에서는 유기농산물을 상업적 방식으로 비싼 가격으로 팔고, 고가의 농산물들을 부자들만 사먹고 가난한 사람
들은 화학농업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먹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최소한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안전
하게 만들어주고 누구나 먹을 수 있게 해주자는 생태 후생 개념과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사회 전체
가 농업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농업의 생태적 전환을 만들어 내고 경제적 약자들에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후생의 개념을 생태적 측면에 접목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 생태주의는 농업과 연관을 맺고 있다. 반대로 표피
생태주이는 농업과 상관없는 생태에 대한 담론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겉은 생태적 포장을 했을 지 모르지만, 기술 혹은 돈
만으로 모든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를 말한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고려 없이 생태에 대해 말한다면 그 사
람은 심하게 말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농업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해줄 기회가 있었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푸코의 책을 환기해본다면, 지금 한국의 학생들은 삼중, 사중의 엄중한 감시망과 대입실패라는 묵직한
처벌의 장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십대들에게 주어졌던 보편적인 덕목인 용기는 이미 거세된 상태다. 참고 기다리면 더
좋은 날이 올까?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이 내가 수년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농업이야말고 고등학생들에게 용기의
대상이다. 지금은 농업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용기다. 모두가 꼭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
대, 농업이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 생태와 문화생산자
문화는 생태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가 자원과 물질의 소비를 줄이면서도
경제활동이 가능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이런 전환을 나는 문화경제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단순 소비자로서의 경제
주체가 아니라 문화를 생산하고 기획하는 다양한 분야를 문화생산자라는 개념으로 제시할 수 있다. 문화생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그러한 활동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실존적 고민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0년, 20년 후의 한국을
상상해보자. 만약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문화의 중요성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 뻔하다. 지금부터 우리가 맞게 될
시기는 두 유형의 인간이 경쟁을 벌이는 시기가 될 것이다. 바로 아파트를 잘 짓는 토건형 소양을 가진 사람들과 생태적으로 사유
하며 생태적 미감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경쟁 말이다. 분명한 것은 생택적 상식을 갖추고 기존의 많은 사회문화적 활동에서 나름
대로 필요한 생태적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움직일 공간이 더욱 넓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 생태적 경제인의 지혜와 용기와 연대
생태적인 측면에서의 세대간 자원 분배 문제에서는 법정이나 경찰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
들이 지금 부터 30~40년 이 지나면 이미 죽거나 호호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정작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을 확률이
높다. 생태계의 많은 현상들은 만약 잘못된 결정을 했을 때 원래 상태로 돌리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거나, 때로 복원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일반적인 경제행위에 대해서는 합리성이 사용되지만 생태와 관련딘 행위에서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경제학자인 나는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이상주의적 삶이나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요구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아주 작은 용기라도...
그 용기의 방향이 연대라는 가슴 뛰는 그런 단어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 뒤에서 5등들을 위한 연가
일반적인 경제학의 관점으로 보면, 아마도 그동안의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교육을 '앞에서 5등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서열식 사유에 나 자신이 상당히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더 똑똑한 학생들에게
생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주는 것,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직장을 갖게 하거나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것. 그런데
이것이 과연생태교육일까? 생태교육은 직설적으로 반에서 뒤에서 5등하는 친구들을 배제하지 않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5등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5등에게도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찾아주거나 혹은 함께 찾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생태교육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경제를 생태적 경제로 전환하는 것 역시 잘난 5등들과 같이 만드는
승리자의 세계가 아니라, 뒤에서 5등들을 위해서 연가를 부르는 것, 바로 그 길이 아닐까?
<요약이라고 하기엔 내용이 넘 많은 가요 야튼 가슴에 와 닿는 것들 옮겨 봤습니다. 원서를 보면 더 많은 내용이 눈에
들어 온답니다. 일독하시길 권해드립니다>
5장 생태적 용기- 고등학생에게 필요한 것
- 왜 지금 용기를 이야기하는가?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인권, 민주주의, 평등, 호혜성, 이 모든 것은 '유예된 가치'일 뿐이다. 그러나 생태경제학적 측면에서
고등학생 나이면 이미 '정상적인 소비자'에 해당하며, 한 사람의 시민 혹은 지구시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생태적 가치는 다른 가치들처럼 유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지역생태계의 몰락이 유예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듯이
고등학생들의 의무도 유예될 수 있는 셩격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가장 억압받으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삶을 수탈당하는 존재가 바로 고등학생들이다. 정작 용기라는 덕목이 십대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덕목임에도
한국에서 그 덕목은 가장 경계하는 것이 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문하고 싶다.
새로 등장하는 십대가 생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이것이 신자유주의로 점철된 시장 근본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중요한 무기가 된다. 굳이 생태적 활동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용기라는 덕목을 추천하는 이유는? 생태적 활동은 개인들의 작은
실천이나 삶의 변화만으로도 시스템 전체에 변화를 만들어낼 여지가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에게 요구하고 싶은
생태적 용기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식단을 약간 바꾸는 것, 인스턴트 패션 대신에 '지속가능한 패션'에 관심을 갖는 것,
유기농 청바지를 한 벌 정도 구매하는 것들이다. 지금 우리의 생태적 문제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큰 실천이든 작은 실천이든
용기가 필요하다. 친환경 제품들의 구매에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때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작은 흐름들이
모여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생태계가 한두 종의 영웅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수없이 작은 생명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풍성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 생태적 소비와 소비자 주권
경제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 누구나 지도자가 되거나 녹색 전사가 될 필요는 없다. 생태적 소비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사실은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단적인 생태운동을 만들어낸 최초의
계기는 바로 소비운동이었다. 19세기 후반 귀부인들 사이에서 자신이 쓰는 모자에 새의 깃털을 꼽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로
인해 뿔논병아리가 멸종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모자에 깃털을 꼽지 않는 것을 좀더 고귀한 일로 간주하는
새로운 유행이 생겼고, 이 흐름은 1889년 영국 왕실보호협회 창설이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실상 최초의 환경단체이며,
조직적인 생태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국가의 국민경제가 더욱 생태적인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닌가, 이것은 시장
자체의 결정이라기 보다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선호나 기호 혹은 문화와 윤리적 전통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소비자들의 집단적 결정이 가장 우선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들이 국가를 생태적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다음 세대를 희생시켜서라도 우선적인 개발을 끌고
나가고자 하는 지금, 소비자들의 선택은 더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은 조직 앞에서 무기력하고, 또
우리가 알고 있던 정보들 역시 때로는 잘못되어 있거나, 의도적이고 교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소비
행위 자체에도 많은 교육과 정보가 필요하며, 결국 일종의 집단적인 '실천적 학습'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 청정 생산과 기업을 보는 눈
청정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더 청정한 상태는 있을 수 없지만, 먹고 소비하고
온도를 유지하거나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은 어쨌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태적 부하'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최소한의 물질들이 완벽하게 재순환되는 방식과 태양광과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구성된다면 청정 생산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당분간은 실현하기 어렵다.
대개 기업을 변하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호나 기호 같은 것들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정부가 실시하는 '제도'다.
기업들은 수십 혹은 수백 가지 제품들을 생산한다. 어느 제품군은 생태적으로 우수하더라도 다른 제품군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기업이 생태적이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어쨌든 대체로 기업은 소비자의 행위
패턴을 한 축으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정부의 제도라는 두개의 신호를 감지하면서 자신의 미래
행위를 결정한다. 생태문제의 주범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국내 단체, 기구, 기업 안에서 이러한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교육과정을 통해 배출된 사람들이라는 점을 환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멀지만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른 길일 수 있다.
- 생태적 노동과 즐거운 삶
존 갤브레이스가 '풍요의 시대'라고 불렀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포디즘 시대까지는 세상이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에서 움직였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할 수 있고,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과 미래를 개척할 수 있었던
시기가 OECD국가들 내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한국에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청년실업을 중심으로 한국의 노동 재생산은 무저졌고, 수출과 수입을 더한 것을 경제의 대외의존도라고 부르는데, 어느새
이 수치는 80%이상이 되었다. '세계의 공장'역할은 낮은 인건비로 버틸 수 있는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에게 자리를 넘겨 준
지 오래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국민경제의 구조적 어려움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경제관료가 믿는 방식대로 고성장 시대로
복귀하면 어떻게 될까? 대기업에 조금 더 많은 정책적 편의를 제공하고, 특히 건설업을 축으로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계속
해서 일으켜서 건설 중심의 내수 경제로 가는 길이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부의 고성장 전략이다. 이러한 고성장 전략은
반생태적 국민경제라고 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나 생물종 다양성과 같은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 지표로 드러난 것은, 바로
케인스 시대 포디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다. 이러한 상황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려고 한다면, '대량
소비'의 폐해가 다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량소비 없이 대량생산이 가능한 경제 시스템이 가능할까? 여기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에너지와 물질의 소비를 문화와 지식에 대한 소비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과시적 소비 문화가 극복되어야 하고 또한 일하는 시간 자체에서 삶의 안정을 찾는 식의 노동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부자들의 에너지 소비는 늘고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 경제 내부의 격차를
줄이면서 동시에 생태적 낭비를 줄여 나가는 것이 생태적 노동의 기본 취지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게으름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빈둥빈둥하면서 지내는 시간은 산책을 하거나,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정한 아름
다움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예술적 창작 같은 데에 쓰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소비를 위해서 노동하고, 마케팅하는 방식만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 정작 또 다른 많은 국민들은 일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상대적 빈곤이 늘어나는 지금 '일해야 즐겁다'라는
오래된 경구들에 진지하게 의문을 던져야 한다. 반생태적 경제에서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신나게 소비하는 것이
즐거운 삶이었다면, 생태적 경제에서는 소비가 아닌 것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생태적 의미에서 경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인지도 모른다.
- 농업 : 심층 생태주의 대 표피 생태주의
시장주의 경제에서는 유기농산물을 상업적 방식으로 비싼 가격으로 팔고, 고가의 농산물들을 부자들만 사먹고 가난한 사람
들은 화학농업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먹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최소한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안전
하게 만들어주고 누구나 먹을 수 있게 해주자는 생태 후생 개념과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사회 전체
가 농업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농업의 생태적 전환을 만들어 내고 경제적 약자들에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후생의 개념을 생태적 측면에 접목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 생태주의는 농업과 연관을 맺고 있다. 반대로 표피
생태주이는 농업과 상관없는 생태에 대한 담론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겉은 생태적 포장을 했을 지 모르지만, 기술 혹은 돈
만으로 모든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를 말한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고려 없이 생태에 대해 말한다면 그 사
람은 심하게 말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농업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해줄 기회가 있었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푸코의 책을 환기해본다면, 지금 한국의 학생들은 삼중, 사중의 엄중한 감시망과 대입실패라는 묵직한
처벌의 장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십대들에게 주어졌던 보편적인 덕목인 용기는 이미 거세된 상태다. 참고 기다리면 더
좋은 날이 올까?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이 내가 수년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농업이야말고 고등학생들에게 용기의
대상이다. 지금은 농업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용기다. 모두가 꼭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
대, 농업이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 생태와 문화생산자
문화는 생태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가 자원과 물질의 소비를 줄이면서도
경제활동이 가능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이런 전환을 나는 문화경제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단순 소비자로서의 경제
주체가 아니라 문화를 생산하고 기획하는 다양한 분야를 문화생산자라는 개념으로 제시할 수 있다. 문화생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그러한 활동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실존적 고민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0년, 20년 후의 한국을
상상해보자. 만약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문화의 중요성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 뻔하다. 지금부터 우리가 맞게 될
시기는 두 유형의 인간이 경쟁을 벌이는 시기가 될 것이다. 바로 아파트를 잘 짓는 토건형 소양을 가진 사람들과 생태적으로 사유
하며 생태적 미감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경쟁 말이다. 분명한 것은 생택적 상식을 갖추고 기존의 많은 사회문화적 활동에서 나름
대로 필요한 생태적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움직일 공간이 더욱 넓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 생태적 경제인의 지혜와 용기와 연대
생태적인 측면에서의 세대간 자원 분배 문제에서는 법정이나 경찰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
들이 지금 부터 30~40년 이 지나면 이미 죽거나 호호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정작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을 확률이
높다. 생태계의 많은 현상들은 만약 잘못된 결정을 했을 때 원래 상태로 돌리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거나, 때로 복원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일반적인 경제행위에 대해서는 합리성이 사용되지만 생태와 관련딘 행위에서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경제학자인 나는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이상주의적 삶이나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요구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아주 작은 용기라도...
그 용기의 방향이 연대라는 가슴 뛰는 그런 단어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 뒤에서 5등들을 위한 연가
일반적인 경제학의 관점으로 보면, 아마도 그동안의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교육을 '앞에서 5등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서열식 사유에 나 자신이 상당히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더 똑똑한 학생들에게
생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주는 것,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직장을 갖게 하거나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것. 그런데
이것이 과연생태교육일까? 생태교육은 직설적으로 반에서 뒤에서 5등하는 친구들을 배제하지 않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5등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5등에게도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찾아주거나 혹은 함께 찾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생태교육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경제를 생태적 경제로 전환하는 것 역시 잘난 5등들과 같이 만드는
승리자의 세계가 아니라, 뒤에서 5등들을 위해서 연가를 부르는 것, 바로 그 길이 아닐까?
<요약이라고 하기엔 내용이 넘 많은 가요 야튼 가슴에 와 닿는 것들 옮겨 봤습니다. 원서를 보면 더 많은 내용이 눈에
들어 온답니다. 일독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논습지위원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우리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 아이들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수능, 내신, 대학이라는 과제 앞에 자신의 사회적 삶을 수탈당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책은 뒤에서 5등들을 위한 연가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찾아주며, 찾게 하는 것이 생태교육임을 이 책의 저자인 우석훈 교수님 생각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린섬(꽃과 나무를 잘 키우고 가꾸는 아이가 또래에서 영웅이다)'이라는 단어가 가슴이 박힙니다. 선진국의 많은 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논습지라는 논학교라는 활동을 통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태적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도록 제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요약을 잘 해주셔서 마음의 감동이 됩니다. 고맙습니다.